
일본 규슈 서남부에 있는 나가사키는 1571년 포르투갈과의 통상을 시작으로 외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개방적인 지역이라 일본과 서양의 문물이 섞인 독특한 매력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하와이 진주만까지 공격했다가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 세례를 받아 시민 8만 명이 사망하고 폐허가 되었던 비극적 장소로도 불린다.
이번 여정은 조선인 징용자의 눈물이 묻혀 있는 군함도와 인류 최초로 핵폭탄이 떨어진 장소에 조성된 원폭 자료관과 희생자를 추모하는 평화공원을 찾아보는 것으로 정하고 유명 관광지는 남는 시간에 둘러보기로 했다.
도착 이튿날 오전, 호텔 인근에 있는 차이나타운 ‘신치중화가’와 1634년 일본 최초의 아치형 돌다리로 만들어진 ‘메가네바시(안경교)’를 빠르게 구경하고 오후에 나가사키 항구 선착장으로 향했다, 첫 목적지인 군함도에 상륙하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날씨가 많이 작용하는 곳인데 다행히 이날은 청명했다. 탑승객 대부분은 단체로 온 일본인 노인들이고 외국인은 우리 일행과 중국, 유럽인이 조금 섞여 있었다. 2층짜리 소형 크루즈선이 출항한 지 50여 분이 지났을 때 눈앞에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바로 군함도였다. 섬 전체가 태풍과 파도를 막는 방호벽으로 둘러 있고 그 안에 빽빽하게 지은 건물들이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일본 군함처럼 보인다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나가사키에서 남서쪽으로 18km 떨어져 있는 이 섬의 정식 이름은 하시마(端島)로 작은 무인도였다. 1887년 섬 주변에서 양질의 석탄이 발견되자 사가 번(佐賀 藩; 현재 사가현과 나가사키현의 일부)의 번주 가문이 서양인 사업가와 해저 탄갱 경영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 최초로 증기기관을 이용한 탄광회사를 출범시켰다.
해저 터널 작업 중에 화재로 여러 희생자가 생기자 채탄 작업은 중단되었고 얼마 후에 채굴권은 미쓰비시의 창업주 이와사키 야타로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는 일화 10만 엔을 주고 채굴권을 인수하고 비좁은 무인도를 1931년까지 6차례에 걸쳐 매립, 확장하여 가로 400m 세로 140m 둘레 1.2km 크기의 직사각형 인공섬을 만들었다. 미쓰비시는 이 좁은 섬에 단층부터 10층짜리 건물 71채를 순차적으로 건설해 광부와 직원들의 숙소는 물론이고 초, 중학교를 비롯해 병원, 목욕탕, 경찰 주재소, 이발소, 우체국, 영화관, 체육관 등 육지 마을과 똑같은 생활 시설들을 설치했다.
가이드의 안내로 관망대를 옮겨가며 살펴본 군함도는 시멘트 건물을 성냥갑처럼 빽빽하게 붙여 만든 모습이었다. 건물 뒤의 골목길은 한두 사람이 겨우 교차할 정도로 좁았고 옆집 가족의 대화 소리도 들릴 듯한 숨 막히는 구조였다. 전성기 시절 거주민이 5천 3백 명을 넘어 세계 1위 과밀도 지역으로 불릴 정도로 인구가 늘어난 이유는 해저 갱구가 4개로 확장되어 많은 채탄 노무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쓰비시는 처음엔 특별대우를 내걸고 일본인, 오키나와인, 조선인, 중국인을 광부로 뽑았다지만 이런 제도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강제 동원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일본인 가이드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강제노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 인공섬에 가까운 구조물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석탄 채굴이 일본의 산업 부흥기에 어떤 이바지했는가를 길게 설명해 단체로 견학 온 일본인들을 감격 시켰을 뿐이다.

1945년 8월에 나가사키 중심부에 원폭이 떨어져 도시가 마비됐으나 미쓰비시는 채탄 작업은 계속하다가 1974년 1월에 해저 탄광을 폐광하며 광부와 주민들을 이주시켜 군함도는 석탄광 발견 1세기 만에 다시 무인도로 돌아갔다.
군함도가 우리나라에서 아픈 손가락이 된 이유는 이곳에 징용된 8백여 명의 한국인들이 탄광 막장에서 노예 같은 대우를 받아 가며 중노동을 하다 그중 122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강제노동의 진실을 숨겨가며 폐허가 된 군함도를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라는 신청서를 집요하게 제출하여 2015년에 지정을 받았다,
문제는 일본 측이 문화유산 지정 시기를 1868년부터 1912년까지 메이지 시대만을 대상으로 신청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이의 제기로 조선인과 중국인의 강제노역을 인지한 유네스코가 군함도의 진실을 바로잡도록 권유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여정 마지막 날은 노면전차 3호선을 타고 평화공원역에서 하차해 가장 가까운 나가사키 원폭기념시설부터 찾았다. 입구 화단 앞에 미국이 보냈다는 평화의 동상이 눈길을 끌었다. 설명을 읽어보고 머리가 터지게 싸운 상대들인데 평화를 내세운다니 이해가 어려웠다. 이 평화 운운은 이날 눈길 닿는 조형물과 사진 속에서도 늘 따라다녔다.
미국의 원폭 투하로 나가사키 사망자 8만 명 중에 조선인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들 영혼을 위로하는 주모비를 지나니 원폭 자료관이 보였다. 입장료 200엔을 내고 들어가자 투하 전후를 찍은 사진과 폭탄 잔해, 당시 투하된 폭탄 모형과 피폭 현장에서 발견된 보존물들이 전시되었는데 상상 이상의 끔찍한 장면도 전시되어 가슴이 아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에는 야외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타며 언덕 위에 조성된 평화공원을 찾았다. 처음 마주친 장소가 평화의 샘이라는 구조물. 피폭 후 피해자들이 몸이 불타는듯한 중세여서 물을 마시고 고통을 이겨내라는 뜻으로 샘을 만들었다는 설명이 쓰여 있다.
공원 한편에 엄청난 크기의 푸른색 조형물이 방문객들을 압도하는 자세로 조성되어 있다. 평화의 기념상이란 동상인데 하늘로 양손을 위와 옆으로 뻗어 있는 모습이 인간의 염원을 상징하는 듯하여 눈길을 끌었다.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 국가로 낙인찍힌 일본이 자신들이 받은 피해만을 상기시켜 평화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려는 자세는 정당하지 않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점에 평화공원과 전시기념관을 만들면서 자국민의 희생만을 나열한 역사 왜곡 사실에 마음이 아려왔다.
또 미국의 군사공격에 대항하여 조선인이 포함된 소년병들을 허접한 비행기에 태워 자살특공대로 내몬 행위까지 평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가고시마현 지란의 가미카제 평화전시관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일본이 진실을 숨겨가며 평화 운운하는 얼굴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글, 사진 / 전의식 주간dynemedia@naver.com
전) 서울신문사 부국장, 문화관광저널 편집주간
현)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삼강문학회 운영위원장, 농민문학 회원, 문예춘추 회원.
저) 텔레비안나이트외 인물전기 집필 다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