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도시 미관 해치는 불법 ‘그라피티’, 해결책은 어디?

도시 미관 해치는 불법 ‘그라피티’, 해결책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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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의 공공시설물마다 검은 락카로 새겨진 문구가 뒤덮여있다. 우체통, 버스정류장 표지판, 지하철 환풍구 등 주변을 둘러봐도 어느 것 하나 온전한 상태인 것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문구들이 건물 외벽과 사유 시설까지 점유하고 있어, 온 거리가 락카 페인트칠이 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태원만큼은 아니더라도 상황은 홍대도 다르지 않다. 거리 곳곳에서 그라피티 낙서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업을 마감한 가게 셔터문, 빌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 등 크고 작은 낙서들이 페인트로 도배돼 있다. 거의 대부분이 사전에 업주 동의나 허가 없이 무단으로 그려진 것들이다.

상인들은 분노했다. CCTV를 설치하고 경고 문구를 붙여 놔도 소용이 없었다. 유성 페인트 성분이라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애써 지워 놓으면 머지않아 새 낙서가 생긴다. 좁은 골목 양옆으로 그라피티가 빼곡하다. 한 상인은 “안 그래도 으슥하고 좁은 골목이 그라피티로 더 할렘처럼 느껴져서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기존 벽화를 훼손하거나, 사람의 손이 잘 닫지 않는 높은 벽까지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일부 주민들은 “그라피티의 성적인 표현과 욕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구들이 거리의 치안마저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며 불안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마포구 홍익공원은 기존 외벽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어지러운 그라피티와 낙서들을 모두 하얀 페인트로 뒤덮은 뒤 방지 가림막을 설치했다. 리모델링을 마친 지 1년 남짓 지났지만, 가림막이 설치돼 있지 않은 건물 뒤쪽으로 다시 그라피티가 등장했다. 불법 그라피티 행위를 금지시키자는 취지가 무산된 것이다.

공공시설물이나 사유재산에 소유주의 허가 없이 그림이나 낙서를 하는 행위는 형사처벌 대상이다. 지난해 11월 자국에서 그라피티로 실형을 선고받은 20대 영국인 형제가, 한국에서 불법 그라피티를 하다가 징역을 살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영국인 형제는 지하철 차량 기지에 숨어 들어가 지하철에 낙서를 그렸다. 피해가 복구 되지 않았고, 영국에서 같은 범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전과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해 징역 4개월이 선고됐다.

저항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그라피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주로 폐허가 된 빈민가나 도심가에서부터 시작됐다. 전철이나 건축물의 벽면, 교각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인 그라피티는 1960년대 필라델피아 갱단에서 자신들의 구역을 알리는 용도로 활용됐다. 이후 뉴욕으로 퍼져 이름을 공공장소에 불법적으로 남겨 악명과 명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 청년들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그리고 약 5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전 세계 거리에서 화려하면서도 현란한 원색의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라피티 예술가로 유명한 뱅크시는 전쟁과 아동 빈곤, 환경 등을 풍자하는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깜깜한 한밤중에 작품을 빠른 속도로 단속반들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그려낸다. 그라피티 행위 자체가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하는 불법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직 뱅크시가 누구인지 정체를 밝히지 않고 베일에 싸여 있는 것도 같은 논리다.

그라피티의 성지인 뉴욕에서도 그라피티는 여전히 불법이다. 지금도 허가받지 않은 공간에서의 그라피티는 재물손괴죄, 건조물침입죄를 적용해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다. 그라피티가 공공질서를 어지럽힌다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인 그림이 도시를 밝힌다는 긍정적인 시선도 배제할 수 없다.

이따금씩 그라피티는 주목받지 못하는 장소를 새롭게 조명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뉴욕 퀸스 롱아일랜드시티에 있는 건축물 ‘5포인츠(5Pointz)’는 20여 년간 그라피티 예술의 성지로 이름을 떨쳤다. 과거 공장 부지였던 이곳에 1993년 건물주가 그라피티 예술을 허용했고, 그 결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라피티 관광 명소가 된 것이다.

허용된 곳에 퇴폐적이거나 혐오적인 내용이 아닌 작품은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서대문구 경의중앙선 신촌역 옆 어두침침했던 신촌 토끼굴이 그라피티로 재탄생된 것이 좋은 예시다.

길이 65m, 폭 4.5m인 신촌 토끼굴은 드라마 ‘도깨비’와 여러 CF 촬영지로 알려졌지만, 조명이 어둡고 냄새가 나는 등 환경이 열악해 개선이 필요한 곳 중 하나였다. 이에 서대문구는 지난해 6월 ‘신촌 토끼굴 관광명소화 사업’ 계획을 세웠고, 토끼굴 내부를 그라피티 작업을 할 수 있게 개방한 것이다. 신촌과 연관 있는 역사적 인물, 독립문과 같은 랜드마크 등이 그라피티로 재탄생해 눈길을 끄는 점이 색다르다.

보행자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라피티 작업 허용시간은 오후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다. 혐오를 유발하거나 퇴폐적, 정치적 색채가 강한 내용의 작품은 금지된다. 개인이 소장하는 작품이 아니라 공공의 장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보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허용되지 않은 지역에 그라피티를 그릴 경우 관련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오래전부터 벽화제작자들에게 공식적으로 벽화를 의뢰해 도시미관을 예술적으로 살려 나가기 위한 장려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라피티는 낙서가 아닌 예술이다. 공허하고 삭막한 아파트 단지 벽의 전문 벽화작가의 작품은 주민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삶의 질을 높인다.

우리나라에서 벽화를 허용한 곳은 아직 적다. 그라피티가 아직 언더그라운드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허가된 장소가 적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무분별한 낙서는 되려 예술장르로서의 그라피티의 발전을 저해할 뿐이다.

낙서 그림이 아닌 제대로 그린 벽화. 오랜 세월로 낙후된 건물, 을씨년스러운 빌딩 숲을 아늑하고 산뜻한 분위기로 바꾸는 데 그라피티는 멋진 키워드가 될 것이다.

오진선 기자 sumauroa@new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