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남성용, 여성용 구분없는 젠더뉴트럴이 뜬다

남성용, 여성용 구분없는 젠더뉴트럴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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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아동복 브랜드 PLEY CLOTHES 2018 화보

남자 아이돌이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품 광고에 출연하고, 여자 배우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루즈핏의 정장을 입는다. 교복 광고에는 여학생이 바지를 입고 등장하고, 남녀공용 유니폼을 입은 항공사도 나타났다. 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젠더뉴트럴이 소비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젠더뉴트럴(gender neutral)은 ‘성 중립’을 뜻하는 단어로, 기존의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이 흐릿해지고 그 구분이 없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니섹스와는 달리 남녀(젠더) 구분 자체를 없애고 중립성을 지향해 사람 자체로만 보려는 움직임이다. 소확행이나 워라밸 같은 개인의 행복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성역할에서도 기존 틀을 벗어나 자신을 표현하고 성에 고정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삶을 영위하는 라이프스타일의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젠더뉴트럴의 중심에는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MZ세대가 있으며, 이들은 패션·뷰티와 같은 소비 분야뿐 아니라 기업의 업무, 사회 문제 해결 등까지 젠더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이를 겨냥한 다양한 마케팅 활동과 새로운 상품군이 속속 등장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이같은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기업들에게 큰 관심을 주고 있다.

하이네켄은 최근 ‘Cheers to All’ 캠페인 영상을 선보였다. 50초 남짓의 짧은 영상 속에서 종업원은 바에 앉아있는 남녀에게 주문한 맥주와 칵테일을 나눠준다. 종업원은 한치의 고민도 없이 여성에게는 칵테일을 남성에게는 맥주를 전해주고 돌아서지만, 실제 맥주를 주문한 사람은 여성이었고, 칵테일은 남성이 주문한 것이다. 마치 여성은 핑크, 남성은 블루라는 식으로 개개인의 취향에 대해서도 성별로 구분하는 편협한 고정관념을 위트 있게 비틀어 보여주고 있다.

청주국제공항을 거점으로 하는 신생 저비용항공사 에어로케이는 국내 항공사 최초로 ‘젠더리스’ 유니폼을 도입했다. 보그코리아 인스타그램 영상을 통해 공개된 유니폼은 봄·가을용 상의는 맨투맨 티셔츠에 자켓, 여름용 상의는 반팔 티셔츠에 조끼고 하의는 모두 바지다. 신발은 구두 대신 운동화로, 치마 정장은 따로 없고 여성과 남성의 유니폼 디자인이 동일하다. 몸에 붙는 치마와 구두를 여성 승무원 유니폼으로 채택하고 있는 국내 대부분 항공사와 차별화된 새로운 시도다.

에어로케이는 유니폼 디자인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승무원들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다. 승무원들은 통상적인 유니폼인 몸에 붙는 치마와 구두를 착용하면 불편할 뿐 아니라 환자 발생 등 비상 상황에서 빠르게 대처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내어놓았고, 이와 같은 승무원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유니폼이 탄생하게 되었다. 유니폼 뿐만 아니라 보통 규제대상이었던 안경 착용을 허용하고 헤어스타일 제한을 적게 두는 등 외모 관련 규정도 다른 국내 항공사보다 자율적이다. 화장에 대한 규정은 젠더뉴트럴을 내세우는 화장품 브랜드와 협업해 남성과 여성 모두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다.

에어로케이 항공사와 협업한 브랜드는 국내 최초 젠더 뉴트럴 색조 화장품 브랜드 ‘라카’다. 2018년 론칭한 국내 최초의 젠더 뉴트럴 색조 화장품 브랜드로 모든 크리에이티브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한 룩을 제안하며 젠더리스 메이크업 카테고리를 선도하고 있다. 성별의 경계가 없는 뉴트럴 메이크업을 표방하며 ‘컬러는 원래 모두의 것’이라는 콘셉트 아래 남녀 모델이 동일한 컬러의 립스틱을 바른 화보를 선보이는 등 독보적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라카는 공식 인스타그램 채널을 통해 에어로케이와 합작한 캠페인 화보를 공개했다. 화보 속 모델들은 에어로케이의 실용적인 유니폼을 입고, 라카만의 뉴트럴 컬러로 메이크업을 완성했다. 캠페인 화보에는 젠더 이분법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가치에 집중하는 두 브랜드의 철학이 담겼다.

이처럼 이미 패션계에서는 성별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진 하이힐·핸드백·리본 등이 남성복에도 차용되는가 하면, 성별 구분을 두지 않은 제품을 내놓는 것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하이패션 브랜드에서부터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구찌, 보테가 베네타, 버버리 등 명품 브랜드들은 기존에는 분리해 소개하던 남, 여 컬렉션을 통합해 하나의 패션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펜디는 여성을 위한 상품으로 여겨졌던 핸드백을 남성 고객을 위해 새롭게 출시했고, 글로벌 아이웨어 브랜드 키블리는 2019년 S/S 시즌에 남성과 여성의 경계선을 허무는 ‘하이퍼 젠더’ 콘셉트로 제품을 발매했다. 옷을 고를 때 사회적인 판단이 아니라, ‘나에게 얼마나 어울리는가’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향수도 성별 분류 방식을 탈피하고 있다. 그간 여성은 꽃이나 과일처럼 달콤하고 상큼한 향, 남성은 나무나 풀에서 온 시원한 향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영국의 시장조사업체 민텔에 따르면 성 중립적인 향수는 2010년 전체 시장의 17%에 불과했지만 2018년 51%까지 성장했다.

젠더뉴트럴은 성인 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어린이와 유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추세다.

학생복 전문 브랜드 스쿨룩스는 지난 8월 걸그룹을 모델로 한 ‘여학생 교복 바지 화보’를 공개했다. 스쿨룩스는 이미 2년 전부터 보이그룹 중심으로 마케팅에 나서는 교복업계 흐름을 벗어나 여학생 교복 바지 화보를 선보이고 있었다. 기존의 여학생 교복은 성 상품화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작고 불편했다. 하지만 바지 교복을 통해 편안함에 집중하는 소비자 니즈를 반영하는 동시에 개개인의 개성 표현에 대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스쿨룩스는 2021년 새학기 동복도 학생 편의에 초점을 맞춘 남녀 동일한 디자인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 국가인권위에 접수된 첫 진정이 ‘영유아용 상품의 색깔별 성별 표기로 인한 차별’ 시정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정을 낸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은 일부 영유아용 옷과 문구류에 여아용은 분홍색, 남아용은 파란색이 정해져 있어 아이들이 색을 고를 권리를 침해한다며, 당장 눈에 띄게 바뀌진 않더라도, 대형업체 한두 곳이 문제 제기를 받아들여 상품 색깔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구분을 없애나간다면 업계 전체에 점진적인 변화를 기대한다는 입장이다.

당연한 듯 여자아이에게는 소꿉 장난감을, 남자아이에게는 자동차 장난감을 쥐여 주는 시대는 지났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의 아이들에게 고정관념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엄격하고 보수적인 교육 분야도 변화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아이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완구 제품에서부터 남아용, 여아용이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통합하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온 것들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당연해질 수는 없다. 당연한 것에 대한 의문은 자유와 유연한 세상을 앞당기는데 기여할 것이다. 남자라서, 여자라서가 아니라 60억 명 모두가 각자의 개성대로 살아가도 괜찮은 미래를 위해, 성별, 국가, 인종 나이를 떠나 다양성의 울타리를 넓혀 나가는 계기의 시작에 젠더뉴트럴이 있다.

오진선 기자 sumaurora@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