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전병열 문화에세이ㅣ가족여행으로 청룡의 기운을 품다

전병열 문화에세이ㅣ가족여행으로 청룡의 기운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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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들뜬 목소리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여행을 쉽게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병열 정치학박사/수필가

하얀 물보라와 청명한 파도의 화음을 즐기면서 우리는 팔짱을 끼고 해변 데크를 걸었다. 여명을 마주하고 일출의 장엄함을 기대했지만, 비구름 속에 감춰진 태양은 계속 침묵하고 있다.

해변에 조성된 둘레길을 정답게 거닐면서 그동안 밀려 있던 이야기꽃을 피우며 아침 공기를 만끽하는 기분은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만족이었다. 간혹 마주치는 관광객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자랑스럽게 으쓱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 그 행복은 배가됐다.

“이게 몇 년 만이야! 우리 가족만 오붓하게 여행한 적이 언제였지?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

아내의 들뜬 목소리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가족여행을 쉽게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엔 평일이지만, 큰맘 먹고 1박 2일의 가족여행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딸아이가 힘들었던 시험을 마치자마자 아내는 아들이 리조트를 예약했다며, 만사 제쳐두고 가야 한다는 성화였다.

사실 새해 들어 일상을 벗어나 바다 품에 한번 안겨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아내와 함께 사찰에서 기도를 올리는 도중에 신년 해맞이를 할 정도로 분주하게 보내야 했다. 딸아이의 인생이 걸린 시험이라 정성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는 로스쿨 3년을 학교 인근 원룸에서 생활하며, 학업에 매달렸다. 아들은 지방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우리 부부가 찾아가야 얼굴을 마주할 정도로 자주 만나지 못했다. 늘 아쉬움 속에 보내야 하는 자녀들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들의 미래를 위해 마음을 달래야 했다.

오롯이 우리 가족이 만나 즐거운 여행을 하게 된 건 자녀들이 성인이 된 후로는 처음인 것 같다. 학창 시절도 서울에서 대학에 다닌 딸은 공부에 열중하느라 방학 때도 대부분 헤어져 있어야 했다.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나도 직장에 얽매여 한가한 시간을 누리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의도적으로 함께할 시간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각자의 생활에 충실하려다 보니 가족애는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 생전에는 우리 6남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연중 한두 번은 여행이나 나들이를 하며 우애를 돈독히 했었다, 당시 어머니께서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새삼 눈에 선하다. 아마 부모로서 느끼는 지금의 심정과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어머니의 행복을 헤아리기보다는 그저 즐겁고 반갑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자식과 함께하는 여행이 이렇게 행복을 안겨 준다는 것을 알았다면 더 많은 여행으로 어머니를 즐겁게 해 드렸을 것이다. 아버님과는 일찍 사별한 관계로 그런 행복을 누리지 못해 늘 안타까움만 더했다. 또 그 당시는 동생들도 학교와 직장 생활에 쫓겨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나 역시 가족보다도 직장이 우선이라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때는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쏟으며, 직장에 매달렸었다. 금성사 냉장고 생산 부서에 근무하면서 첫 주와 셋째 주 일요일은 쉴 수 있었지만, 그 주 토요일은 철야 근무를 해야 했다. 요즘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혹사였지만, 당시는 당연한 일과로 받아들였다. 불평불만은커녕 한 대라도 더 생산하기 위해 근로자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객지에서 생활하던 때라 설 추석 명절에만 고향 땅을 밟고 그리운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럴 때도 부모님의 애틋한 마음보다는 고향 친구가 좋고 동생들이 반가웠다. 부모님의 자식 애정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부모님과 보내기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휴가가 끝나면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돌아오기에 바빴다. ‘네가 부모 되면 알리라’는 노래 가사가 새삼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이들이 지금은 진정한 애정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평화롭게 잠든 모습을 보면 귀염둥이로 자라면서 행복을 안겨주던 시절이 오버랩 된다. 이번 여행이 끝나면 또다시 각자의 생활로 분주할 테지만, 새해 가족여행으로 청룡의 꿈을 안겨주고 싶은 부모의 간절함을 헤아려 줄 것으로 기대하며, 또 다음 여행을 계획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