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관광 수원 트래블 ㅣ 노을 물든 성곽 따라, 정조의 꿈을 걷다

수원 트래블 ㅣ 노을 물든 성곽 따라, 정조의 꿈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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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곽 건축의 꽃 수원화성, 역사와 축제로 깊어지는 가을 여행

성곽 위로 가을바람이 스치고, 기와지붕 너머로 붉은 노을이 천천히 번진다. 팔달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돌담과 도심을 품은 성문, 물가에 내려앉은 누각의 그림자가 수원의 가을을 한 폭의 풍경으로 완성한다. 조선 성곽 건축의 꽃이라 불리는 수원화성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대왕의 깊은 효심과 새로운 나라를 향한 개혁의 꿈이 깃든 공간이다. 성곽길을 걷고 화성행궁의 전각 사이를 거닐다 보면, 230년의 시간을 건너온 왕의 뜻이 오늘의 도시 풍경과 겹쳐진다. 여기에 정조의 효심과 애민정신을 공연과 체험으로 풀어내는 수원화성문화제가 더해져 가을 여행은 더욱 풍성해진다. 낮에는 돌과 벽돌에 새겨진 역사를 만나고, 해 질 무렵에는 노을을 따라 발걸음을 늦추며, 밤에는 축제의 빛과 이야기에 머무는 시간. 수원화성에서 역사와 낭만이 어우러진 가을의 하루를 만난다.

이명이 기자 lmy@newsone.co.kr

효심으로 쌓고, 개혁의 꿈을 담다

수원화성의 시작에는 아버지를 향한 정조의 깊은 그리움이 있다. 정조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 곧 장헌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명당으로 여겨지던 수원 화산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화산 부근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했고, 새롭게 조성한 도시를 둘러싸는 성곽을 세웠다. 1794년 1월 시작된 축성은 1796년 9월 완공으로 이어졌다.

성벽에 담긴 뜻은 효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정조는 당파 간 대립을 넘어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수원화성을 그 정치적 구상을 펼칠 중심지이자 수도 남쪽을 지키는 국방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과 개혁을 향한 의지가 만나 하나의 도시를 이룬 것이다.

성곽 따라 걷는 길, 역사가 풍경이 되다

수원-화홍문

수원화성을 걷다 보면 성곽이 지형을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서쪽에서는 팔달산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고, 북쪽과 동쪽에서는 비교적 평탄한 길을 따라 도심을 감싼다. 전체 둘레 약 5.7㎞의 성곽에는 성문과 수문, 군사를 지휘하던 장대, 적의 동태를 살피던 공심돈 등 다양한 시설이 배치돼 있다. 돌과 벽돌의 조합, 성벽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여장, 바깥으로 돌출된 방어시설을 살펴보면 아름다운 외관 속에 담긴 군사적 기능을 읽을 수 있다. 산지와 평지를 함께 이용한 구조는 자연 지형을 활용한 조선 후기 축성 기술을 보여준다.

장안문

성곽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기 좋은 곳은 북문인 장안문이다. 정조가 한양에서 내려와 이 문을 통해 수원에 들어왔기 때문에 수원화성의 정문으로 여겨진다. 커다란 홍예문 위로 2층 문루가 올라서 있고, 문 바깥에는 출입구를 보호하는 옹성이 둘러져 있다. 정면에서 성문의 규모를 살펴본 뒤 옆으로 이동하면, 문루와 성벽, 옹성이 서로 맞물린 구조가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주변 도로의 차량을 함께 바라보면 옛 도시의 관문이 오늘의 생활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수원-화서문

장안문에서 동쪽 성곽을 따라 이동하면 수원천 위에 놓인 화홍문을 만난다. 북수문인 화홍문은 일곱 개의 홍예로 물길을 통과시키고, 그 위에 누각을 세운 구조다. 아래에서는 아치 사이로 이어지는 하천을 살펴볼 수 있고,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돌다리와 누각이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성 안팎을 흐르는 물길을 유지하면서 방어 기능도 갖추도록 만든 시설이라는 점에서, 화홍문은 수원화성의 실용적인 설계를 보여주는 장소다.

화홍문 가까이에 자리한 방화수류정에서는 성곽의 분위기가 한층 섬세해진다. 성벽과 누각, 그 아래 용연이 어우러져 수원화성에서도 손꼽히는 경관을 만든다. 누각을 가까이에서 보면 지붕의 선과 기둥의 배치가 눈에 들어오고, 용연 쪽으로 내려와 올려다보면 성벽 위에 솟은 정자의 전체 모습이 드러난다. 같은 건축물도 바라보는 높이와 방향에 따라 인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연못 가장자리를 천천히 걸으며 누각과 성곽을 함께 담으면, 방어를 위해 세운 건축이 주변 자연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느낄 수 있다.

수원-서장대

수원화성의 독특한 건축을 살펴보고 싶다면 서문인 화서문과 그 곁의 서북공심돈도 눈여겨볼 만하다. 공심돈은 내부가 비어 있는 높은 방어시설로, 군사가 안에서 적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공격에 대응하도록 만든 건축물이다. 서북공심돈은 성문 옆에 우뚝 서 있어 낮게 이어지는 성벽, 곡선적인 문루 지붕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벽돌로 쌓은 몸체와 외벽의 구멍을 살펴보면 일반적인 누각과는 다른 쓰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화서문과 공심돈을 함께 바라보는 장면은 수원화성이 미관과 방어 기능을 동시에 고려한 성곽임을 잘 보여준다.

평지의 성곽길에서 팔달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여행의 시야도 달라진다. 경사를 따라 오르며 가까이 보이던 성벽과 지붕을 내려다보게 되고, 서장대에 이르면 성곽 안팎의 도시가 한눈에 펼쳐진다. 군사 지휘를 위해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장대의 위치를 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래로는 화성행궁과 도심의 건물들이 자리하고, 멀리 이어지는 성곽은 옛 수원의 공간을 짚어준다. 오르막에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평지에서 보지 못했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성곽을 둘러본 뒤에는 화성행궁으로 내려와 정조의 발자취를 이어갈 수 있다. 정조가 아버지의 원침을 찾는 길에 머물렀던 행궁은 성곽의 군사적 공간과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정문을 지나 마당과 전각을 차례로 마주하면 왕의 행차를 맞이하던 공간의 짜임이 드러난다. 특히 봉수당은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열었던 곳이다. 성곽에서 도시 전체를 바라본 뒤 행궁의 마당으로 들어서면, 수원화성에 담긴 정치적 구상과 가족을 향한 정조의 마음을 함께 헤아리게 된다.

수원-서북공심돈

축제로 깨어나는 역사, 노을로 깊어지는 가을

이러한 역사가 오늘의 문화로 펼쳐지는 무대가 수원화성문화제다. 정조의 효심과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한 축제는 성곽과 행궁을 배경으로 공연과 체험,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여행객을 역사 속으로 이끈다.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과 함께 즐기면 왕의 여정과 도시의 이야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2026년 제63회 수원화성문화제는 10월 4일부터 11일까지 수원화성 일원에서 열린다. 올해 주제는 ‘백성을 널리 이롭게 하는 새로운 빛’을 뜻하는 ‘새빛홍민’으로, 행궁광장과 화성행궁, 연무대, 용연 등으로 축제의 무대가 이어진다. 연무대의 주제공연 ‘야조’, 용연의 수상 공연 ‘선유몽’, 화성행궁 전각을 이동하며 이야기를 따라가는 ‘시간여행_그날 행궁야화’ 등이 역사 공간에 새로운 감각을 더한다.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은 10월 4일 수원 구간에서 펼쳐졌다.

수원화성의 여운을 길게 누리고 싶다면 해 질 무렵까지 머물러 보자. 낮 동안 선명하게 드러났던 성벽의 윤곽은 노을 아래에서 한층 부드러워지고, 기와와 돌담은 따뜻한 빛을 머금는다. 성곽을 걷던 여행이 저녁의 공연과 야경으로 이어지면 같은 공간에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행궁동 골목에서 잠시 쉬어 가며 여행의 속도를 늦추는 것도 좋다.

수원화성에는 아버지를 향한 마음으로 시작해 백성과 나라의 미래로 뻗어간 정조의 꿈이 남아 있다. 그 꿈을 따라 걷는 길 위로 오늘의 일상과 축제의 활기가 흐른다. 노을이 내려앉는 성곽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는 순간, 수원의 가을은 오래된 역사와 함께 여행자의 기억에 깊이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