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죽암 전명운 의사 72주기 추모식 개최

죽암 전명운 의사 72주기 추모식 개최

공유

– 국립 서울 현충관 50여 명 참석 추모

지난 11월 18일 11시 국립 서울 현충원 현충관에서 죽암 전병운 의사 72주기 추모식을 가졌다.

전희구 담양전씨 대종회 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모식에는 윤재희 한국독립동지회 상임부회장을 비롯한 보훈처, 광복회 관계자와 담양전씨 문중 대표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전명운의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국가 보훈처와 광복회가 후원한 이날 행사는 전세중 시인의 약전 봉독에 이어 윤 부회장과 문중을 대표한 전병출 담양전씨 대종회 부회장이 추모사를 낭독했다.

추모사를 마친 후 유진모 문화평론가가 전명운 의사 추모시를 낭송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 일동이 기립하여 전명운 애국가를 힘차게 제창했다,

이어서 유족 및 내빈이 헌화하고 분향하는 순서를 가졌다. 참석자 대부분은 차례로 헌화와 분향에 참여해 고인의 넋을 기리며 추모했다.

유족 대표로 전의식 전명운 의사 사손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추모식은 성료 됐다.

참석자들은 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오찬을 함께한 후 개별적으로 전명운의사 묘역에 들려 참배를 하기도 했다. 특히 10명이 참석한 마창종친회에서는 새벽 5시 30분에 봉고차로 출발하는 열성을 보였다. 마창 존진회는 매년 10~15명이 참석해 전명운 의사를 추모했다.

<전명운 의사 약전>

전명운 의사는 1884년 서울 종현(현 명동성당 부근)에서 태어났다. 20대 초반에 일본인들이 한국인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을 목격하고 혈기에 못 이겨 이들을 구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일본 관헌의 추격을 받게 된 전 의사는 상하이를 거쳐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학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 미주의 항일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해 기관지인 ‘공립신보’ 6인 발기인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한다. 청년 전명운은 일제의 침략에 남달리 울분을 토하며 국권 회복을 다짐하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일제는 1904년 한일 강제 협약으로 고문정치를 자행하면서 미국인 스티븐스를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임명한다. 스티븐스는 ‘을사늑약(1905.11.)’과 ‘정미7조약(1907.7.)’ 등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에 적극 동조한 친일 매국노였다. 그의 식민지 정당화 관련 망언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격분한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회원들이 발언 취소를 요구하며 항의하게 된다. 그러나 스티븐스이 오히려 한국을 모독하자 이에 격분한 회원들은 그를 구타하고, 이 소동으로 스티븐스는 워싱턴으로 떠나게 된다.

이에 전 의사는 “금일의 사태를 보건대 병력으로 대적할 수는 없는 고로 세부득이(勢不得已) 총살의 계교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그해 3월 23일 전 의사는 이를 결행한다.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출발하기 위해 페리부두에 도착해 자동차에서 내리는 순간 권총 방아쇠를 당겼지만 불행히도 불발되자 전 의사는 돌진해 권총 개머리로 가격한다. 스티븐스가 넘어졌다 일어나는 순간 장인환 의사가 3발의 총을 발사해 2발이 스티븐스를 명중시키고 1발이 전 의사 어깨를 관통했다. 전 의사와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이틀 후 스티븐스는 사망한다. 그 후 전 의사는 재미교포들의 도움으로 97일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아 보석으로 출소한다.

전 의사는 ‘한인공동회’ 주선으로 러시아 연해주로 거처를 옮겨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특히 공립협회에 가입한 안중근 의사와는 같은 숙소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이등박문 처단 의거 혐의의 수배를 피해 전 의사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롤 돌아온다. 전 의사는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맨티카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돼 3·1운동을 후원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으로 헌신한다. 조국 광복의 기쁨을 잠시 누렸으나 정세가 여의치 않아 귀국하지 못하고 미루다 1947년 11월 18일 로스엔젤리스에서 향년 63세로 서거했다. 이날이 서거 72주년이다.

전병열 기자 newsone@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