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서라벌에서 남산으로 가는 통로

[문화유산기행] 서라벌에서 남산으로 가는 통로 <월정교(月淨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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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경주 교촌 한옥마을은 인기 있는 관광지이다. 지척에 있는 월정교가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 월정교를 지나 신라 탐방길을 한번 걸어 보는 것도 오묘한 즐거움이 있을 것 같다. 특히 문천에 반영된 화려한 조명에 빛나는 월정교의 아름다운 자태는 정말 환상적이다.

신라 천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남산 둘레길 월정교는 경주 월성에서 남산 쪽으로 연결되는 통일신라 시대의 다리이다. 조선 시대에 와서 월정교(月淨橋)의 정의 한자 표기가 淨→精으로 변형되어 표기되었다. 그 옛날 서라벌 사람들은 월정교를 통해 남산으로 향했는데 그 월정교가 최근에 다시 복원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9년(760)에 “궁의 남쪽 문천(蚊川)에 ‘월정과 춘양’이라는 두 다리를 놓았다.” 라고 전한다. 한편 춘양교를 일정교라 불리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민간 신앙이나 전설 등이 덧씌워져 ‘효불효교(孝不孝橋)’ 또는 ‘칠성교(七星橋)’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월정교는 월성의 서남단과 동북단을 잇는 다리로 건설되었다. 이 다리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완성된 월성과 함께 전제왕권의 권위를 과시하고 중앙의 지방 통치라는 상징적 지배 의도가 충분히 담겨 있었다고 생각된다. 2001년 시굴조사 결과 일정교와 월정교는 교각이나 교대의 조성 기법이 같았음이 밝혀졌다. 이는 의 문헌기록과 부합되는 것이다. 또한 다리 폭도 12m 내외로 같다. 이것은 신라의 도로 폭과 관계된다. 왕의행차, 군사훈련, 재례의식 등 기마군대의 행렬이 지나는 어떤 도로의 기준 폭을 알려 주고 있다고 본다. 일정교와 월정교는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본다. 일정교는 양(陽), 월정교는 음(陰)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월정교는 정궁인 월성과, 일정교는 동궁과 연결되어 있음이 재미있다.

월정교를 지나 남산 방면으로 들어서면 도당산이 먼저 나온다. 그 길 좌우로 인용사지와 천관사지가 있다. 그리고 도당산을 올라가면 남산으로 이어진다. 도당산은 신라 시대 네 곳의 영지 중 남쪽의 오지산을 말한다. 바로 남산의 북쪽 봉우리다. 이 길은신라의 왕과 왕비가 거닐던 길이다. 최근에 신라 천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남산 둘레길로 조성되었다. 월정교에서 시작해 남산으로 통하는 길이다. 둘레길로 들어가면 월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이며 쉼터인 화백정(和白亭)이 있다. 화백정에서 월성쪽으로 바라보면 월정교를 포함해서 교촌 한옥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둘레길의 숲길은 걷기 편하도록 경사진 곳에는 나무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화백정에서 남산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식혜골 입구에 도당터널을 건설하여 산업도로를 건설하면서 없어졌던 남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다시 만들었다. 도당터널 위 천여 평의 부지에 있는 화백광장은 작은 식물원과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신라 둘레길은 비교적 평탄한 길이라 부담없이 걷기 좋은 길이다. 그 옛날 신라인들이 이렇게 하여 남산으로 올라가서 남산을 불국의 성지로 만들었던 것인가? 많은 이야기를 품은 신라 시대의 월정교가 드디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이야기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교촌 한옥마을은 신라 시대 요석공주(瑤石公主)가 살던 요석궁터라고 전해 오고 있다. 신라 태종 무열왕의 둘째딸 요석공주의 남편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요석공주는 젊은 청상과부로 지내고 있었다.이때 원효(元曉)는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세우리라(誰許沒柯斧我斫支天柱, 수허몰가부아작지천주)” 하고 노래를 퍼뜨렸다. 자루 없는 도끼는 여성을 나타내고 요석공주를 의미하며 도끼자루는 남성을 뜻하고 원효 자신을 의미함을 무열왕이 알고 “이것은 스님이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현명한 아들을 낳겠다는 말일 게야.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큰 이익이 있으려고.”라고하면서, 때마침 요석궁에 과부로 지내는 공주를 떠올렸다.무열왕은 궁궐 관리에게 원효를 찾아 데려오라 명하였다.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오다 문천교를 지나는데, 관리를 만나자 거짓으로 물속으로 떨어졌다. 위아래 옷이 몽땅 젖었다. 관리는 스님을 궁으로 데려가 옷을 갈아입히고 빨아 말리게 하였다. 원효의 젖은 옷을 말려주던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고 설총(薛聰)을 낳게 되었다. 훗날 설총은 최치원, 강수와 함께 신라 3대 석학으로 이름을 날렸다.설총의 탄생은 원효를 파계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정작 원효자신은 파계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원효는 속인으로 돌아와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부르며, 이때부터 도리어 일반 백성을 향해 부처의 이름을 더욱 높이 외쳐 알렸다. 승려와 과부 공주 사이에 태어났으나 설총 또한 출생의 비밀에 얽매지 않고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월정교는 과연 홍예교(虹霓橋)였는가?

고려 명종(明宗, 1170∼1197)때 경주 출신 시인이자 문관인 김극기(金克己)가 지은 시에 ‘홍교도영조문천(虹橋倒影照蚊川)’이라는 구절이 있다. “무지개 다리가 거꾸로 강물에 비친다”는 내용이다. 이를 견주어 생각하면 다리는 아치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월정교의 석재 중에 일부 난간석은 홍예교의 밀림과 뒤틀림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하천바닥에남아있는 우물 정(井)자 형태의 목재로 만든 틀이 발견되었다. 문화재 감정 전문가들의 생각은 이 목재 틀이 홍예다리의 하부 구조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월정교가 홍예교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주장의 근거는 홍예석이 없다는 사실에서 근거한 말이다. 홍예석은 상하 폭의 미미한 차이와 특이한 형태로 인해 홍예석으로의 판단이 어려웠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시인 김극기의 주장과 같이 수직 교대 위에 홍예를 올렸음을 설명할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건설된 중국의 여러 다리에서 누교(樓橋)로 만들어진 홍예교를 확인한 것으로 추증된다.

월정교를 아름다운 누교(樓橋)로 재현(再現)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원성왕 14년(元聖王, 798) 3월에 궁의 남쪽 누교에 화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리의 위치가 궁의 남쪽이면서, 가설시기가 798년 이전에 누교로 만들어진 다리는 바로 월정교와 일정교를 가리킨다. 따라서 누교는 월정교를 말하거나, 아니면 월정교 이전의 다리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월정교는 760년에 건설되어 고려 시대인 1280년에 중수한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월정교는 적어도 520년 이상 교량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복원 사업이 시작되기 전에 월정교는 양측 교대의 일부와 교각석이 남아 있었다. 월정교 복원 공사에 앞서, 복원에 사용할 석재의 종류를 결정하기 위하여, 월정교에 사용된 석재 유구와 석재 유구에 대한 암석학적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월정교 건설 당시 사용된 석재로는 경주 일원의 남산 화강암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경주남산 동측사면 하부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화강암이 월정교 축조에 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월정교를 발굴하면서 연함과 기와, 와정, 철못 등이 출토되어 누각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길이 60.57m의 월정교 아래 교각 사이에서 불탄 목재와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누각 양식을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동시대의 건물을 비정하여 복원설계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월정교의 교량은 교각간(橋脚間) 중심 거리는 12.55m로 일정하고, 교대와 교각간 거리는 11.46m로 교량의 길이는 약 61m이며, 폭은 약 12m이다.

월정교는 교각의 윗면이 누각과 지붕으로 구성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완만한 홍예로 된 석교 위에 회랑 형식의 지붕이 설치된 누교 형태의 다리이다. 누교는 다리 위에 누각(樓閣)이나 다리 전체를 회랑(廻廊)과 같은 건물로 덮은 다리를 말한다. 그리고 급한 물살에 견디도록 교각을 배 모양으로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배 모양의 교각과 누교이며 다리 양쪽에 2층 문루(門樓)를 갖춘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양쪽 문루로 올라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문루에는 출토 유물과 교량건축의 시대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디지털 전시관과 월정교 역사와 복원과정을 담은 영상관이 있다. 월정교에 진입하는 양쪽 입구에 사자상을 복원하여 진입로중앙을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다. 복원된 월정교 상부 누각의 전체 규모는 현재 남아 있는 유구와 신라 왕경길의 폭을 감안하여 결정하였다. 평면은 양쪽에 협칸을 두어 총 3칸으로 구성하였다. 각 칸의 너비는 통일신라 시대의 수레바퀴 자국의 폭을 참고하여 정했다. 양쪽의 협칸에는 사람이 통행하며 쉴 수 있도록 난간에 의자를 설치하였다. 이 의자는 기둥과 기둥을서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여 난간과 함께 건물을 보다 견고하게 한다.

누교의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만들었다. 상부에는 대들보와 종보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처마는 홑처마로 막새기와를 올렸다. 기와는 월정교에서 출토된 기와를 참고하여 만들었다. 난간은 만자형(卍字形) 난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양한 철물장식을 하여 통일신라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월정교는 규모가 큰 다리이기 때문에 가운데가 쳐져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부를 60cm 올려 건축하였다. 바닥은 장마루를 깔아, 보다 견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다리 월정교를 직접 건너볼 수 있게 되었다. 월정교를 지나 신라 탐방길을 한번 걸어 보는 것도 오묘한 즐거움이 있을 것 같다. 특히 월정교의 야경은 꼭 봐야 할 명장면이다. 문천에 반영된 화려한 조명에 빛나는 월정교의 아름다운 자태는 정말 환상적이다.

월정교가 있는 남천은 지금도 경주벌을 적시며 흐른다. 그 옛날 신라 왕조 천년을 이어 왔던 남천은 오늘에 이르러 그 흐름이 예와 같지 않다. 다만 몇 조각남은 석축이나 유구에서 옛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뿐이다. 남천의 졸졸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에서 옛 전설을 되씹어 볼 뿐이다. 서라벌의 융성을 가져왔던 이 시내가 지금은 메말라가고 있다. 신라의 역사가 이 남천으로 대변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화유산 박기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