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한국판 그랜드 투어 ‘알쓸신잡’

한국판 그랜드 투어 ‘알쓸신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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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 상류층 자제들 사이에서 유행한 유럽여행이 있다. 이 여행은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 말은 영국의 가톨릭 신부 리처드 러셀스(Richard Lassels)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건축과 고전, 그리고 예술에 대해 알고 싶다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방문해야 하며, 젊은 귀족의 자제들이 세계 정치와 사회,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랜드 투어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랜드 투어의 특이점은 대개 가정교사를 대동한다는 것이다. 귀족 자제들은 직접 여행을 함과 동시에, 가정교사로부터 그곳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현장에서 듣고 학습하게 된다.

최근 TV 프로그램에서 21세기 한국판 그랜드 투어라 불릴만한 프로그램이 나타났다. 지난 6월 시작한 tvN의 ‘알쓸신잡’이 그것이다. 자칭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며 스스로를 낮춘 이 프로그램은 현 시대 지식인이라 불리는 전 정치인 겸 작가, 음식칼럼니스트, 뇌과학자, 작가 4명이 국내 한 지자체를 각자 여행하고, 이후 저녁을 함께 하며 자신이 방문한 여행지에 대해서 ‘잡담’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프로그램이다. 10월부터 방영된 ‘알쓸신잡2’에는 작가 대신 건축가가 대체되며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가 ‘알아두면 쓸데없는 지식’이라는 자체 평가와는 다르게 대중들에게는 상반대의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얻고 있다. 누구나 여행지에서 관광안내책자, 관광안내판 이면에 담긴 역사적 사실과 배경을 알고 싶어 하지만, 속 시원히 듣진 못했던 숨겨진 이야기를 4명의 지식인들은 객관적인 사실과 자신의 해석을 담아 대중들에게 쉽게 들려준다.

‘알쓸신잡’은 여행지에 대한 깊고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 진다는 점에서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유행했던 영국의 그랜드 투어와 많이 닮았다. 하지만, 상류층 자제들을 위한 것이 아닌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전혀 다른 가치를 가진다.

그랜드 투어가 그 이름대로 위대한 여행이 될 수 있는 건, 여행을 통해 여행자가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행지의 역사, 문화, 지역민의 삶을 들려주고 대중들에게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알쓸신잡은 이미 21세기의 위대한 여행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고경희 기자 ggh@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