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내지 말고 능력껏 하라”
– 재단이사장을 총재가 맡도록 한 일이 자랑스럽다
– 망백(望百)의 나이에 35년 ‘개참상’ 받아
– 리켄케이키코리아(주) · 매일산업 창업, 중견기업으로 성장
전병열 chairman@newsone.co.kr · 이명이 기자 lmy@newsone.co.kr
그는 부산제주지구재단(이하 지구재단)을 지구로 이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재단 설립을 추진한 3660지구 총재와 후임 총재가 재단 이사장 문제로 갈등이 생기면서 지역 대표였던 그가 추천돼 제2·3대 지구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그 후 그는 효산 김채곤·대송 이근철·조일 김봉수 전 총재와 합의하고 지구재단을 지구로 이관해 확대 발전시켜 나갈 것을 약속하는 서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재단을 지구로 이관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 고충이 컸다고 그는 회고한다. 당시 그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몇 번씩 찾아가 “지구 총재가 이사장을 맡아야 재단에 힘이 실린다”며 “그래야만 총재가 재단을 키우려 노력하고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 결과 총재가 재단 이사장을 맡으면서 이어져 오늘날의 지구재단으로 발전하게 됐으며, 그는 지구재단 명예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강서구 화전산업단지에 위치한 리켄케이키코리아(주) 회장 집무실에서 만난 산촌 이철훈 명예이사장(이하 이사장)은 100수를 바라보는 망백(望百)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기가 넘쳐났다. 누구보다도 지구재단에 애정이 많은 그는 재단의 산증인이다. 지구재단 이관 당시 네 사람이 서명한 합의서를 찾아 올해 이사장 이·취임식에서 재단에 넘겼다며, 힘겨웠던 당시의 에피소드를 꺼냈다.

재단 기금을 목적 외 사용해선 안 된다
재단 기금을 지구 운영에 사용하는 여론이 있다는 말을 꺼내자, 이사장은 “기금을 목적 외 사용해선 절대 안 된다”며 단호하게 말한다. 재단 설립 목적 외 사용은 위법이라고 강조한다. 제주 지역이 소외된 느낌을 받지 않느냐고 묻자 “이번 재단 이사장 이·취임식에는 제주 3662지구에서 이사가 참석했다”며 “3660지구로 분구하기 전에는 제주에서 기금도 많이 냈는데 차츰 열기가 식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철훈 이사장은 10여 년 전 인터뷰에서 지구재단이 이대로 성장하면 10년 후는 100억 원 기금 모금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예상만큼 발전하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그는 “지난 회기 4,000만 원을 기부했는데, 살아 있는 한 힘닿는 데까지 기부할 계획이라며 재단 기부금으로 장학금을 줄 수 있어 기쁘고 큰 보람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1억 원을 기부하면 장학금으로 연 550만 원을 받을 수 있어 어려운 학생들을 도울 수 있다는 그는 지금까지 지구재단에 2억여 원을 기부했다. 그는 “장학생은 동아대학교 등으로부터 추천을 받고 고교생은 회원들의 추천으로 선발한다”며 “장학금을 받은 학생 중 1명이 동아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이번에 카이스트 대학원 석사과정에 합격해 인사를 왔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2014년부터 대학원생 1명, 대학생 7명, 고교생 16명, 중학생 1명 등 총 25명에게 6,550만 원을 장학금으로 지급했다.
자수성가로 중견기업 리케케이키코리아(주) 창업
그는 1980년 장모님으로부터 100만 원을 빌려 안전보호구 수입업체 ‘매일산업’을 창업한다. 창업 초기의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한 매일산업은 2000년 일본의 ‘리켄케이키’와 기술제휴로 국내 최초의 가스유출 감지기 생산 업체인 리켄케이키코리아(주)를 설립하고 사세를 확장한다.
그의 집안은 거제 유지로 숙부가 제2대 국회의원(이채오, 1919-2005년)과 수산업중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셋째 숙부는 산림조합장, 선친도 농협조합장, 수협조합장을 지낸 명문 가문이다. 하지만 그가 동국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 부친이 62세에 돌아가시고, 형님이 자산을 관리하게 된다. 그는 대학원 졸업(석사) 후 농림부에 입사해 2년여 동안 공직 생활을 하다 사업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 숙부 회사에서 자재과장으로 근무하다 상사와의 갈등으로 퇴직해 사업가의 길을 선택했다. 유산을 받은 형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자립심이 강한 그는 이를 마다하고 장모님이 곗돈을 탔다는 소리를 듣고 빌려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미국 MSA사와 총판 협약
“지인의 소개로 안전보호구 유통업체인 매일산업을 개업했지만, 국산으로서는 수익을 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 세계적인 안전보호구 생산업체인 미국의 MSA에 거래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어요. 그런데 한국 유통관리는 일본에서 한다는 회신을 받고 ‘재팬 MSA’에 편지를 보냈더니 이미 한국에서는 ‘동진기업’이라는 곳에서 총판하고 있다고 회신이 왔어요. 그곳을 찾아갔더니 자기들은 주로 광산업체만 하니까 대전 이남은 우리 회사에서 하라고 승낙해 줬어요, 석유화학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입될 시기였어요.”
삼성석유 화학에서 가스 누출 측정기를 납품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국산 제품이 없어 MSA 제품을 수입고자 거래 요청을 하게 된 것이다. MSA 제품을 수입해 판매·납품하면서 매일산업은 날개를 달았다. 이철훈 이사장은 당시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IMF로 사업 위기
“제가 직접 방진 마스크 영업을 했는데, 발이 부르틀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그러니까 대우조선에서부터 포항종합제철, 강원산업, 광양종합제철, 현대중공업 등 대기업은 거의 납품했어요. 하루 1만 명이 마스크를 쓰면 1만 장의 필터가 필요합니다. 필터는 매일 1~2장씩 교체해야 하는데, 일본을 통해 재료를 통째로 받아 가공해 납품했어요. 당시 납품 1개당 300원이 남았는데 하루에 300만 원을 번겁니다.”
하지만 잘나가던 회사가 IMF로 인해 환율이 급등하고, 결국 MSA 제품 수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급기야 회사가 문을 닫고 밤새 울기도 했다는 그는 당시의 아픔을 추억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절망하고만 있을 수 없었던 그는 활로를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명색이 대학원을 졸업한 내가 온 집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어요. 당시 거제도 전체에서 서울로 유학해 대학원을 나온 사람은 5명도 안 됐어요. 저는 평소 스스로 ‘나는 잘살아야 한다. 나는 꼭 잘 살 거다’는 다짐을 해 왔었어요. 그러다 지인(김덕준 새부산RC회원)의 소개로 일본의 리켄케이키를 알게 됐어요. 측정기 규격이 MSA 제품은 큰 데 반해 일본 제품은 규격이 동양인 체질에 맞게 아담해서 업체들이 선호했어요. 그래서 리켄케이키 제품을 일부 사용했는데, MSA와 거래가 중단된 후 운 좋게 리켄케이키 사장을 소개받은 거죠”
리켄케이키코리아(주) 설립
리켄케이키는 100년 된 건실한 중견 기업으로 세계적인 회사다. 그는 이 회사 오너의 전격적인 지원으로 리켄케이키코리아(주)를 설립한다. 리켄케이키코리아는 그가 65%를 출자하고 일본이 35%의 지분을 갖고 있으며, 주요 부품을 제외하고는 일본과의 기술제휴로 대부분 자체 생산한다. 선박과 석유화학 분야는 대부분 리켄케이키코리아가 맡고 있으며, 한국은 물론 중국 등 세계 각국을 맡아 납품한다. 그는 그동안 선박 1,600여 척에 가스측정시스템(Gas Detection System)을 설치했으며, 현재 70여 척의 발주를 받아놓고 있다. 향후 반도체 분야까지 맡아달라고 요청해 그에 대비하고 있다며 그는 기염을 토한다.
정시 출퇴근, 건강․자기관리 철저
금정구 부곡동에서 위치한 매일산업 4층 건물을 팔고 이곳 화전산업단지에 1,000평을 매입해 800평 규모의 회사 건물을 신축했다.
그는 매일 7시 기상, 11시 취침하며 정시에 출퇴근해 업무를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다. 큰아들이 서강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총괄 업무를 맡고 있으며, 둘째 아들이 울산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매일산업 영업을 담당하고 있다. 셋째 아들은 해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리켄케이키코리아 영업 담당이다. 이사장은 회사가 반도체 분야 진출 등 계속 확장 중이고, 더 큰 시장으로 확대해 나가야 하므로 당분간 직접 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며 노익장을 과시한다. 60대 장년으로 보인다며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저는 집에서 꼭 밥을 먹습니다. 주식은 잡곡밥이고, 저녁은 집사람이 끓여주는 누룽지를 먹습니다. 운동은 맨손 체조와 겨울철에는 우리 회사 대회의실을 주 3회 정도 6천 보 이상 걸어요.”
그의 성공 비결은 뭘까?
“저는 이 조그마한 회사 두 개가 큰 성공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연 매출 250여억 원 정도밖에 안 되는데, 몇천억 원하는 회사도 많잖아요.” 겸손한 말씀이라며 후진들을 위해서 조언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뭐니 뭐니 해도 근면 성실입니다. 다음은 자기 능력에 맞게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만큼만 투자하고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우리 회사는 돈을 빌려 본 적이 없어요, 땅을 1만 평가량 매입했지만, 은행에서 한 푼도 빌리지 않고 내 돈으로 샀어요.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사업가는 머리를 써야 합니다. 아이디어가 있어야죠. 삼성 현대 등 거래처를 다니다 보니까 플라스틱 귀마개를 한 근로자들이 모두 귀가 아프다고 야단인 거예요. 그런데 어디 가니까 미국산 스펀지 귀마개가 보이는 겁니다. 순간적으로 아이디어가 나온 거죠. 서둘러 미국 제조회사로 서신을 보냈더니 업체 간부가 직접 출장을 나왔는데, 설득 끝에 한국총판 계약을 하고 납품하게 됐어요. 1개 80원에 수입해서 150원을 받았으니까 70원이 남는 겁니다. 한 달에 50만 개를 팔았어요. 지금도 한국3M에서 받아 대기업에만 납품을 하고 있습니다.”IMF로 인해 MSA를 폐업하고 고심하던 중 그의 아이디어와 판단력으로 귀마개 사업을 통해 위기를 넘기면서 리켄케이키코리아를 설립한 것이다. 그의 기업 스토리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봉사로 사회 공헌
그는 회사가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사회 공헌 차원에서 50대 초반에 로타리에 가입했다. 큰돈 들이지 않고도 능력껏 봉사할 수 있다는데 매력을 느꼈단다. 35년 개참상을 받을 만큼 로타리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일본에 출장을 갔는데 로타리 배지를 보고 로타리안이냐 묻고는 그냥 패스시켜 줬어요. 로타리 배지가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내가 입회할 당시는 회원 입회 자격이 엄격했어요. 아무나 로타리안이 될 수 없었어요.” 그의 로타리 애정은 남달랐다. 경제가 힘드니까 훌륭한 회원들이 탈회해서 안타깝다는 이사장은 “회원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로타리의 가치와 선한 일들을 많이 경험해 봐야 한다”며 또 “이번 등불 총재는 바쁜 일정에도 클럽별로 공식 방문을 하던데 그 노력과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총재나 클럽 회장이 열심히 하는 걸 보고 나도 힘닿는 데까지 도와주려고 애쓴다고 덧붙였다. 거제시 시민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거제향인회 회장 재임 때 그가 1억 원을 기부하고 열심히 모금해서 회관 빌딩을 건립하기도 했다. 고향 동부면 산촌에 별장 겸 주택을 갖고 있는 그는 명절 때는 전 가족 동반으로 고향을 찾는다며 고향 사랑이 남다르다. 전주 이씨로 왕손의 후예라며 가문에 대한 자부심도 드러낸다.
그는 지구재단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려면 총재가 솔선수범하고 클럽에 독려해야 하는데 지구 운영은 열심히 하지만 재단에는 가시적인 효과가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한다. 이사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그는 대송 이사장 재임 때 재단 기금을 호텔에 투자했는데 지금 잘 운용되고 있다며 등불 이사장께 기대를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이철훈 이사장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지구재단을 위해서 가지고 있는 부동산이 잘 처분되면 5억이나 10억 원 정도 기부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국제로타리를 위해, 국가를 위해, 세계 인류를 위해 반드시 그의 꿈은 이루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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