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얻은 인생, 봉사로 삶의 보람을 찾고자 로타리 선택
“내가 만든 제품은 나의 얼굴이다”라는 신념으로 일군 엔디에프
전병열 기자 chairman@newsone.co.kr · 이명이 기자 lmy@newsone.co.kr
밀양시 삼량진읍 용전산업단지에 위치한 엔디에프는 3,700평의 대지에 건평 2,000평 규모의 건물들이 들어서 그 위용을 자랑한다. 대표이사 집무실에서 마주한 고당 이기용 부산신화 RC 초대회장(사진)에게 공장 규모에 감탄을 표하자, 그는 엔디에프의 성공 비화를 진솔하게 털어놓는다.
경남 함안 대산면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부산으로 이주해 부산이 제2의 고향이다. 그는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동의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다. “기술을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 직장이 우선이다. 어렵고 힘들어도 신부(참고 견디다)를 잘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가난과 싸워 온 그는 이 말을 신념으로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 평생 한 직종에서 외길을 걸어온 끝에 오늘날의 그가 된 것이다. 그는 냉간단조품 전문기업(자동차 조형, 제동, 형가장치 등)으로 업계에서 유수의 반열에 오른 <엔디에프>의 대표이사다. 29세 때 업계 지인의 권유와 지원으로 금형 제조업을 창업했다. 하지만 경쟁업체로 인해 물량이 줄어들고 심지어 기존 거래 업체까지도 등을 돌렸다. 견디다 못한 그는 회사 설비를 챙겨서 투자해 준 지인의 회사로 들어가 다시 직원으로 근무를 시작한다. 본인의 기술로 열심히 생산하면서 기업의 성장을 도왔다. 직장 생활 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신기술 개발에 몰두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찾고자 했다.

그러던 중 경쟁업체 대표로부터 대구 영업소장 제의를 받고 고민하다, 대구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겠다는 판단으로 승낙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언젠가는 재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어요. 새벽 6시에 출근해 본사에서 납품할 물품을 싣고 대구 영업소에 도착해 거래처를 쫓아다니다 보니 밤 10시가 넘어서 부산 집에 도착하는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800만 원으로 상가 전세를 얻어 대구로 이사를 했어요. 영업소 개설 후 한 3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 신규 업체를 발굴하고 거래처도 많이 늘렸어요. 그렇게 해서 회사가 안정됐는데 회사 대표가 자신의 친동생을 후임자로 영업소에 보낸 거예요. 이제 내 사업을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세운 거죠.”
막상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사업 자금이 문제였다. 동업자를 구하자는 생각으로 물색하다 회사 직원 중 사업을 구상하는 기술자를 찾아 제안했다.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수익을 반분하는 조건으로 설득해 나갔다. 반신반의하고 있던 그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승낙을 받았다. 본사와는 불편한 관계가 됐지만, 당시 상황으로는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익힌 노하우로 열심히 신규 거래처도 늘리는 등 전력을 쏟았다. 회사가 안정되면서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하고 한숨을 돌리는 그때 1997년 IMF가 닥쳤다. 당시 대부분이 어음 거래였는데 여기저기서 부도가 터지기 시작했다. 결국 주거래 업체까지 부도가 나면서 그는 회생 불능으로 판단하고 공장을 이전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동업자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설득하자 황당해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동안 대구에서 친분을 쌓은 선후배들의 도움을 받아서 금요일 밤 12시에 전격적으로 이사를 했다. 지게차와 트럭을 동원하고 어느 섬유 회사의 창고를 얻어 설비를 옮긴 것이다. 금요일 이사를 마치고 다음 주 월요일 생산을 하도록 준비했다. 기존 거래처를 놓칠 수 없었던 그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가 활동하고 있는 조기축구회 멤버들이 적극 나서서 도와줬다. 생산 체제를 갖춘 후 그는 거래 업체를 찾아다니며 설득했다. 회사가 도산한 줄로 알고 있던 거래처들은 뜻밖에 대표가 나서서 공장을 이사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전후 사정을 들어 설득하니까 믿기 시작했다.
문제는 거래처와의 신뢰를 회복했지만, 재료 발주처에서 부도난 회사라며 공급을 중단해 생산할 수 없게 됐다. 그는 결국 모든 거래처를 소집해 “일을 해야만 당신들 빚을 갚을 수 있지 않겠느냐”며 설득하고 “내가 현재 가진 담보는 납품하는 거래처밖에 없지만, 6개월만 도와주면 그 이후부터는 변제할 수 있다”고 설득해 승낙을 받아냈다. 그 후 3여 년이 지나면서 원상회복이 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이가 36세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순조롭게 안정을 찾을 것으로 기대한 그에게 또 다른 난관이 찾아왔다. 동업자가 동업에 대한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불러서 설득하고 조언했지만, 동업자의 불안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결국 결별을 결심하고 그에게 공장 운영에 대한 노하우를 인계하고 “회사가 안정될 때까지 거래처 관리를 내가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거래처로 연락해서 변함없이 지원해 달라고 부탁도 했다. 그동안 그가 쌓아온 신뢰로 거래처가 그 외의 의리를 지켜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명진정밀’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명진정밀은 그가 처음으로 설립한 회사다.

엔디에프의 성장 비화
고당 대표는 대구 명진정밀을 인계하고 금형 기계 두 대만 가지고 부산 사상공단으로 내려왔다. 2000년에 남도산업을 설립했으나 기술력만 믿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그는 일감조차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찌라시’용 카탈로그를 만들어 업체를 찾아다니며 뿌렸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수소문 끝에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부탁해 업체를 소개받기도 했다. 하지만 열악한 시설을 확인한 업체에서는 거래를 꺼렸다. 소개를 해준 지인이 마지막으로 소개해 준 업체의 아이템이 우리와 여건이 맞았다. 그런데 기존 납품업체가 동종 업계의 친구였다. 난감했지만, 소개해 준 지인에게 더 이상 실망을 시킬 수는 없었다. 부득이 친구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3개월만 밀어달라고 사정해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또 있었다. “자동차 업계에 오더를 받기 위해 영업을 하다 보니 비용이 배보다 배꼽이 더 컸어요. 6개월 정도 해보고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해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어요.” 살길은 기술개발뿐이라고 생각한 그는 우선 작업 공정을 줄여서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그렇게 되면 기존 업체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경쟁이 아니라 상생할 수 있다고 판단해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신기술 개발에 성공하자 여기저기서 문의가 쇄도하고 기존 업체들과 제휴를 하기도 했다.
“냉간단조에 안 되는 아이템이 있으면 남도산업에 가면 해결된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동종 업계에서는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나는 기술력으로 승부를 겨루기 때문에 비교가 될 수 없었죠. 그래서 여러 가지 상생 방안을 제안했지만, 경쟁 업체들은 소극적이었어요.”
그런 와중에 대구의 모 수출업체가 미국에 납품했는데 반품이 됐다며 그에게 11개나 되는 아이템이 의뢰가 들어왔다. 그는 성공적으로 그 작업을 해냈다. 그로 인해 그는 미국 현지 공장에까지 출장을 가게 됐다.
“미국에서는 CEO가 직접 오는 걸 보고 굉장히 신뢰했어요. 게다가 그 회사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아이템이 많았어요.” 공정을 줄이는 방법으로 신뢰를 쌓으면 주문이 들어올 것으로 확신하고 귀국하자마자 김해시 상동으로 공장을 확장했다. 그런데 2006년 6월 26일, 날짜를 정확히 기억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생산 체제를 갖추고 시작하려는데 11가지 아이템이 주문서에서 빠진 것이다. “중간 오퍼가 방해를 한 거죠. 결국 물량이 전부 취소돼 버렸으니 할 일이 없어진 거죠. 울화병이 생길 정도로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모든 걸 포기하고 중국으로 친구를 따라 여행을 떠났어요. 뜨거운 여름인데도 그 충격으로 감기 몸살까지 심하게 앓았어요.” 중국으로 도피성 여행을 떠났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이 떠나지 않았다.
현대 · 기아자동차 SQ 인증서 획득
고민 끝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형님이 거래하고 있는 현대 · 기아자동차 SQ 인증서를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SQ는 현대 · 기아자동차 품질 인증서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당시 그가 제작하고 그의 형님이 납품을 맡고 있었다. 어렵게 형님의 협조를 받아 SQ 인증서에 도전한 것이다. “그 과정은 굉장히 힘들었어요. 각고의 노력 끝에 2007년 4월 현대 · 기아자동차 SQ 인증 시험에 합격했어요. 하늘의 별을 딴 기분이었죠.” 인증서를 받았다고 해서 당장 물량이 쏟아지는 건 아니다. 그는 영업을 뛰기 시작했다. “부족한 장비를 더 늘려서 할 수 있다고 약속하고 주문을 받아서는 외주로 돌려서 만들어 냈어요. 힘들게 만들어 놓은 조건을 남들에게 뺏길 수 없었어요. 그렇게 한 아이템씩 늘려가면서 장비도 한 개씩 늘려나갔어요. 기존 장비를 교체해야만 주문량을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수입이 나는 대로 장비에 투자한 거죠.”
그의 노력은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SQ 인증서를 받은 계기로 기업 확장을 계획한다. 2006년 김해시 상동면으로 이주한 남도산업은 확장하면서 엔디에프(NDF)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이후 용전산업단지로 이전 확장한 엔디에프는 부설 기술연구소도 운영하면서 2017년 은행 융자 등 100억 원대의 자금으로 대지 3,700평, 건평 2,000평으로 공장을 증축했다. 일각에서 우려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지인들과 관계자들을 불러 거창하게 개업식을 했다. 당시 11명의 직원으로 연 매출은 60억 원에 불과했다. 이후 엔디에프는 모든 시설을 갖추고 성장을 거듭해 40여 명의 직원과 연 매출 200억 원의 중견기업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오로지 “내가 만든 제품은 나의 얼굴이다”는 신념과 기술력 하나만으로 일군 엔디에프의 성공 비화는 자수성가한 한 편의 신화였다.
제2의 인생을 로타리 봉사로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한참 일할 그때 갑자기 목 디스크가 터졌다. 병원에 입원하고 보니 그에게는 그 순간이 휴식이었다. 앞만 보고 달려온 그에게 입원은 오히려 행복이었다고 술회한다. 2011년 목 디스크를 치료하고 나자, 악재가 겹쳐 2013년에는 뇌동맥류 진단을 받았다. 뇌동맥류 시술을 한 의사가 그에게 “당신은 지금 제2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며 당시의 위급했던 상황을 설명해 줬다. 한마디로 죽었다 살아 난 것이다.
그는 이를 계기로 제2의 인생을 보람 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러던 중 로타리클럽 창립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그는 ‘재부산 함안군청년회장’ 맡고 있었는데 청년회를 중심으로 신생클럽을 창립해 보라는 대송 이근철 당시 총재의 권유였다. 그는 로타리 봉사로 새로운 인생을 펼치겠다는 의욕으로 선두에 섰지만, 신생클럽 창립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확고한 의지로 창립 초기의 난관을 극복하고 현재 회원 50명이 넘는 중견클럽으로 성장시켰다.
“제2의 인생은 로타리 봉사와 함께하겠다”고 밝힌 그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작은 힘을 모아 더 큰 봉사도 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는 “일할 때는 내가 만든 제품은 나의 얼굴이라고 했는데, 로타리에서는 ‘인생은 봉사다’라는 신념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덧붙인다.
고당 대표는 현재 재부산 함안군 향우회장을 맡고 있으며, 큰아들(39세)이 가업승계를 준비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경북대 AI 생물학 연구실에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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