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공사 소식 기억해야 할 여행 ‘서울 다크 투어리즘’ 명소 소개

[서울관광재단] 기억해야 할 여행 ‘서울 다크 투어리즘’ 명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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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 서울관광재단 제공

서울관광재단(대표이사 이재성)이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를 소개한다.

남산 국치의 길

오랫동안 서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해온 남산은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강화도조약 이후 영역을 넓혀가던 일본은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남산 자락에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여러 시설을 만들었다.

남산 국치의 길은 그 흔적을 따라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조성된 길이다. 길은 ‘한국통감관저 터’에서 시작된다. 1910년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과 총리대신 이완용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현재 통감관저 터에는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해 ‘기억의 터’를 조성했다.

남산 자락을 따라 리라학교와 숭의여대로 향한다. 리라학교 내 남산원에는 노기신사 터가, 숭의여대 교내에는 경성신사 터가 남아있다. 당시 숭의학교는 신사 참배에 반대해 자진 폐교했으며 해방 이후 1953년 경성신사 터 위에 다시 숭의학교를 세웠다.

남산 케이블카 탑승장 방향으로 남산을 올라 더 위로 가면 한양공원 비석이 나타난다. 한양공원은 1910년 일본인들을 위해 세워진 공원으로 당시 공원의 입구에 세워져 있던 비석이었다. 후에 조선 신궁이 건립되면서 사라졌다가 케이블카 정류장 근처 숲에서 발견해 지금의 자리에 비석을 세웠다.

남산을 향해 걷다보면 서울교육청 과학전시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이 계단은 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엔딩 장면으로 많이 알려져 삼순이 계단이라는 애칭이 붙었지만 일제강점기 때에는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일부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지어진 조선신궁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위폐를 봉안하고 국가의 안녕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것을 없애버리고 일본의 건국 신과 천황을 숭배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조선신궁은 해방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됐으며 시민들을 위한 남산공원이 조성됐다.

경제 침탈의 길

보신각 남쪽 광교를 시작으로 숭례문을 지나 서울역까지 이르는 구간은 일제강점기 조선은행을 비롯해 수많은 은행이 밀집했던 금융 지역이었다. 현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는 조선은행, 현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에는 조선저축은행, 신한은행 광교 영업부 자리는 한성은행, 광교약국 자리에는 민족계 은행인 동일은행 등이 있었다. ‘경성의 월스트리트’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당시 상업적으로 가장 발달한 공간이었다.

그중에는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도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이다. 나석주 의사는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창숙 선생의 요청으로 조선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하했다. 안타깝게도 폭탄이 불발이 돼 폭파 작전은 실패했지만 총격전을 통해 토지개량부 간부들을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나석주 의사는 추격하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하였으며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현재의 KEB하나은행 명동 사옥에 있었다. 그 앞에 나석주 의사의 의로움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서 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본당으로 알려진 명동성당으로 향하면 다크 투어와도 연관이 있다. 일제치하 당시 이재명 의사는 친일파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신문 보도를 접하고 변장해 이완용에게 다가가 칼로 복부와 어깨를 찔러 중상을 입혔다. 이완용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이재명 의사는 일본 경찰에 체포돼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에 순국했다.

지금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사용 되는 이 장소는 1911년 일제는 조선 은행법을 만들고, 1912년 르네상스 양식의 3층 건물을 준공해 조선은행을 열었다. 일제는 이곳을 본점으로 하여 한국 금융계를 장악하고 중국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고종의 길

고종은 경복궁에서 일제에 의해 명성 왕후가 시해되자 궁을 몰래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데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 말한다. 2011년까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부지가 한미 정부의 합의에 따라 우리나라 소유로 바뀌면서,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경복궁을 빠져나왔던 길을 복원하였다. 힘이 없던 나라의 치욕을 기억하는 고종의 길은 총 길이가 불과 120m로 천천히 걸어도 10분이 되지 않는 짧은 코스이다. 궁녀가 타던 가마에 몸을 싣고 도망쳐야 했던 고종의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 10분이 마치 1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이자 남편으로서 고종이 겪었을 슬픔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고종의 길 끝에 다다르면 아관파천의 목적지인 구 러시아 공사관 건물이 나타난다. 6.25 전쟁 당시 파괴되어 첨탑과 지하 통로만 남아있다. 현재는 안전 문제로 인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밖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고종은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머물다 외국 공관이 밀집해 있던 정동의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된다.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격동의 시대로 흘러가는 조선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덕수궁이 위치한 정동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된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내려와 정동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기울어가는 조선의 비운을 간직하고 있는 덕수궁 중명전을 만날 수 있다. 중명전은 서양식 궁궐 건축물로 황실도서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졌다가 덕수궁에 불이 난 후 고종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1905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맺으려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넘나들며 3일간 고종과 대신들을 압박했다. 결국 중명전에서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외교권을 상실하게 되고, 5년 후에는 일제식민지가 되는 한일병합조약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때문에 중명전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장소이다.

중명전을 나와 정동길을 걸으며 서울시립미술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이화학당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근대 역사의 시작이자 아픔의 뒤안길인 정동길에서 우리의 과거를 기억해본다. 덕수궁까지 둘러보았다면 조선 호텔 앞에 있는 환구단까지 가보는 것이 좋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환구단에서 하늘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의식을 행한다. 1913년에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파괴되었지만,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황궁우는 아직 남아 있다.

역사박물관

서울 속 다크 투어를 한다면 서울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서울은 조선의 수도 한양이었으며, 식민지 시절의 경성 시대를 거쳐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로 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반도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의 오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기관으로 본관을 비롯하여 경교장, 돈의문 박물관, 경희궁, 한양도성박물관, 청계천박물관 등 다수의 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수도 한양의 건설부터 가장 번화했던 종로와 국가의 행정과 사법 기능을 담당했던 육조거리, 그리고 북촌, 중촌, 남촌의 모습에 관한 전시를 하고 있다. 6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전시물을 천천히 돌아보며 과거 조선의 한양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해준다.

서울박물관 뒤쪽으로는 경희궁으로 연결된다.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도성이 모두 불타버린 후 광해군 때 재건된 창덕궁이 조선 후기의 법궁 역할을 했고, 경희궁은 두 번째 궁으로 여러 왕이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어 궁궐의 정취를 잃고 말았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5대궁 모두 일제강점기 때 많은 훼손을 당한 아픔이 있지만, 경희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1618년에 창건된 이래 재해를 입은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파괴된 지금의 모습이 더욱더 아쉽게 다가온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돈의문 마을 박물관으로 향한다. 돈의문은 우리에게 서대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일본은 경성을 도시계획 한다는 명목 아래 돈의문을 철거하였고, 서울의 사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지 않는 문이 되었다. 돈의문 안쪽에 자리하고 있던 새문안 마을은 60~70년대 입시 학원과 과외방이 몰려있던 사교육의 장소였고, 90년대부터는 식당 골목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곳이다. 2003년 돈의문이 뉴타운으로 선정되면서 기존 건물이 전면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서울시는 성문 안 동네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하여 철거 계획을 취소하고 마을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돈의문 마을 박물관에서는 서예나 공예, 전통차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며, 일반 건물들은 독립운동가의 집, 생활사 전시관 등으로 꾸며 놓았다. 박물관이라는 딱딱한 느낌보다는 편하게 즐기며 놀다 갈 수 있는 동네 골목길처럼 정겨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서대문형무소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수감되었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1907년 경성감옥으로 시작하여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해방 후에는 서울 구치소로 역사를 이어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철거가 논의되기도 했으나,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역사관으로 복원했다.

실제 구치소의 정문을 그대로 살려 만든 역사관의 매표소 앞에 서면 입장하기 전부터 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일제는 갖은 명목을 붙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였다. 일제 강점기 때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간 독립투사만 4만여 명이라 전해진다. 경성감옥 옥사의 규모만 480평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 핍박 받았던 조선인들은 상당히 많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형무소의 모습은 자신의 청춘을 피눈물과 맞바꾼 독립투사를 떠오르게 한다. 형무소를 거쳐 간 독립운동가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5천여 장의 수형 기록표를 모아 놓은 전시실에 들어서면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온다. 앳된 얼굴을 한 소년, 소녀부터 백발이 성한 노인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제에 대항했던 그들의 모습을 보니 숙연해진다. 모진 고문을 겪으며 고된 시간을 보냈을 독립투사의 사진 속 눈빛은 여전히 비분강개하다. 경건한 마음으로 독립투사 분들의 사진 속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들과 천천히 눈을 맞추며 오늘날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해주신 점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사형장 입구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우두커니 서 있다. 독립투사들은 사형장으로 들어서기 전 나무 앞에 서서 마지막으로 울분을 토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루나무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날에는 통곡했던 그들의 숨결이 바람 타고 형무소를 떠다닐 것만 같다.

한 줄기 빛조차 허락되지 않던 독방과 섬뜩했던 고문 장면을 복원해놓은 고문실, 시체를 몰래 내다 버리던 시구문까지 둘러보며 당시의 흔적을 더듬어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빠르게 변하면서 점차 희미해질 100년 전의 역사이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새겨야 할 역사의 현장이다.

​망우리공원

조선 태조 이성계는 선왕들의 능지를 정하기 위해 현재의 동구릉을 찾았다. 그런데 무학대사가 이곳은 선왕보다는 이성계의 능지로 더 적합하다고 추천하였고, 이성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시 한양으로 환궁하던 이성계가 고개에 올라서서 동구릉을 바라보며 “이제는 근심을 잊게 됐다.”라고 말했다 하여 망우(忘憂)라는 이름이 붙게 됐다고 전해진다.

이성계는 망우 고개에서 근심을 잊었지만, 현재의 망우리 공원에는 나라에 대한 근심걱정이 가득했던 독립투사부터 유명 예술인까지 민족의 독립과 계몽을 위해 노력한 선조들이 잠들어있다. 1933년 미아리 공동묘지가 가득 찰 것에 대비하여 망우리에 70만 평에 달하는 부지를 공동묘지로 조성하였다. 일본은 서울 시내에 남아있던 공동묘지를 망우리나 미아리로 옮겼다.

최근의 망우리 공원은 숲과 산책로를 따라 애국지사의 묘역을 만나는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안창호, 한용운, 지석영, 이중섭, 박인환 등 이름만 들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인물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에서 100m 거리 안팎에 묘지가 있기 때문에 걷기에 어렵지 않고 자연스럽게 길을 따라 걸으며 위인들을 만날 수 있다. 호젓한 숲길을 걸으며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힘썼던 위인들을 만나러 가니 무더위에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가장 먼저 유관순 열사가 모셔진 합장비를 찾았다. 3.1운동으로 체포된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는데 일제에 의해 이태원 공동묘지 어딘가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 이태원의 무연고 묘지가 망우리로 이장되면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결국 찾지 못하였으니 이태원 합장비와 함께 분묘를 만들어 그녀의 넋을 위로한다. 3.1운동 당시 18세의 꽃다운 나이였던 유관순 열사가 보여줬던 고결한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안창호 선생의 묘지가 있던 터로 가보았다. 안창호 선생은 신민회, 흥사단, 임시정부 등에서 활약하며 우리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지도자로 건국훈장 최고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위인이다. 안창호의 비서로 활동했던 적이 있는 유상규는 외과 의사로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조선인들에게 무상치료도 활발히 할 정도로 애국하는 마음이 강했다. 하지만 유상규는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피부질환)에 감염돼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안창호 선생은 유언으로 유상규 의사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로 유상규 의사를 아꼈다. 안창호 선생의 유언에 따라 유상규 의사 위쪽에 잠들어 있다가 도산공원이 조성되면서 묘지를 이장하였다.

망우리 공원에 안창호 선생과 더불어 대한민국장을 받은 분이 한 명 더 있으니 바로 한용운 시인이다. 우리에게는 ‘님의 침묵’이라는 시로 잘 알려진 한용운 시인은 민족대표 33인으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스님이었던 그는 불교도들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복을 1년 남겨놓고 별세하여 망우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망우리 공원에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도 묻혀있다. 조선의 산림이 황폐해 가는 것을 보고 한국의 산림녹화에 힘을 썼다. 그는 한국의 문화가 좋아 한국말을 쓰고 한복을 입고 진정한 우리의 이웃으로 살았다. 일제의 식민지배 겪으면서 수많은 수탈을 당했지만 그중에는 우리의 문화를 아끼고 지켜준 일본인도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보면 좋을 것 같다.

전세리 기자 jsr@news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