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천오백 년 전 신라의 재해 극복 흔적, 영천 청제비 ‘국보’로 격상

천오백 년 전 신라의 재해 극복 흔적, 영천 청제비 ‘국보’로 격상

공유

– 신라의 치수 기술과 국가 운영체계 담긴 비문… 원형 그대로 남은 희귀 문화재 –

[영천] 이근대 기자 lgd@newsone.co.kr

신라가 자연재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 경북 영천의 「청제비」가 국보로 승격됐다. 1969년 보물로 지정된 지 55년 만이다.

국가유산청은 20일, “비석 자체는 물론 그 내용까지도 신라 국가 운영의 실체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영천 청제비」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비석이 자리한 곳은 경북 영천의 ‘청못’ 옆. 비문은 별도의 받침돌 없이, 자연석 두 면에 직접 새겨졌다. 이곳에서 기자가 만난 지역 문화재 해설사 이모 씨는 “지금도 장맛철마다 수문을 열고 닫는 이 저수지는, 신라 법흥왕 때 축조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실제 치수시설”이라며 “비석 내용은 단순한 공사기록이 아니라, 당시 국가가 백성의 삶과 자연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라고 설명했다.

비문 앞면인 ‘청제축조비’는 536년, 법흥왕 23년에 제방을 처음 쌓은 기록이다. 공사 규모와 책임자, 인력까지 상세히 적혀 있다. 뒷면 ‘청제수리비’는 798년, 원성왕 대에 수리된 내역을 남겼다. 두 비문이 한 비석 앞뒤에 새겨졌다는 점은 극히 드물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6세기와 8세기, 두 시기 신라 정치와 기술 수준을 함께 살필 수 있는 유일한 사례”라고 말한다.

실제로 현장에 서 보면, 비석의 돌결은 바람과 시간에 마모됐지만 비문은 놀랄 만큼 또렷하다. 기자가 확인한 바로는 “▨탁곡”처럼 일부 마모된 글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록은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양호한 상태였다. 서체 역시 당대 신라 서풍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단순히 ‘비석’ 이상의 미학적 가치를 지닌다.

청제비 옆에는 조선 숙종 대인 1688년, 비석을 다시 세웠다는 ‘청제중립비’도 함께 남아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중립비조차 신라체의 서풍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고유한 필체를 고수하며 과거의 가치를 되새기려 한 조선 시대 인식이 엿보인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 비석은 신라가 자연과 맞서며 물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중앙과 지방이 어떻게 협력했는지 등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라며, “무엇보다 조성된 이래 1,500년 가까이 자리를 옮기지 않고 현장에 남아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에 함께 지정된 보물에는 조선 궁중의 장면을 묘사한 병풍과 전적, 목판 6건이 포함됐다. 하지만 단연 주목받는 것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이 물길을 다듬는 청못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이 비석이다.

역사가 사라진 자리에 흔적을 남기기보다, 역사 위에 무게를 얹은 듯 서 있는 「영천 청제비」. 그 무게는, 이제 ‘국보’라는 이름으로 더 깊이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