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청 조선 왕실 사당 ‘관월당’, 100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오다

조선 왕실 사당 ‘관월당’, 100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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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맞아… “역사의 고향으로 돌아간 문화유산”

[유산청]이명이 기자 lmy@newsone.co.kr

관월당(해체 전/일본)

지난 6월 23일, 한 시대의 기억을 품은 조선 왕실 사당 ‘관월당(觀月堂)’이 마침내 고국 땅을 밟았다. 일본에 머문 지 정확히 100년 만의 귀환이다. 이 건축물은 그 자체로 왕실의 위엄과 전통 건축의 정수를 담고 있었고, 이제는 문화유산 외교의 산증인이 되었다.

이번 귀환은 일본 가마쿠라의 사찰 고덕원(高德院) 주지 사토 다카오(佐藤孝雄)와 한국 국가유산청,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수년간의 신뢰와 연구를 바탕으로 협업한 결과다. 관월당을 구성하던 목재 부재는 일본 현지에서 정밀 실측·기록 작업 후 해체돼, 고덕원 주지의 진정성 있는 기증 결정과 함께 조용히 한국으로 이송됐다.

사당 건축물에서 문화외교의 상징으로

관월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단층 구조의 전통 목조 건축물로, 조선 후기에 건립된 왕실 사당으로 추정된다. 서울 도심 어딘가에 위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1924년, 조선식산은행에서 일본 야마이치 증권 초대 사장 스기노 기세이에게 증여되며 본국을 떠났다.

그 후 1930년대, 스기노가 관음보살상을 모신 기도처로 사용하도록 고덕원에 건물을 기증하면서, 관월당은 일본 가마쿠라 사찰 경내의 한 켠에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한국의 전통 사당 건축이 일본 사찰의 기도처가 되었던 지난 100년, 건물은 문화적 충돌과 변형 속에서도 그 정체성을 온전히 간직해왔다.

현지 조사에 따르면, 관월당은 대군(大君)급 인물을 위한 위계 높은 사당으로, 궁궐 및 궁가 건축에서만 나타나는 정교한 의장 요소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파련대공, 초엽, 안초공 등은 건축적으로도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요소로 평가된다. 단청의 경우 구름무늬(운보문), 만자문 등 전통 문양들이 선명히 남아 있어, 왕실 건축물로서의 격식과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현지서도 변형 겪어… 한국에서 원형 복원

현지 해체 과정에서는 이 건물이 일본으로 이건되면서 구조와 재료에서 일부 변형된 흔적도 다수 발견됐다. 일본산 안산암과 응회암으로 조성된 기단, 화방벽(방화용 벽체), 덧지붕 등은 조선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기단 내부는 뒤채움 없이 비어 있었고, 일본 목재상의 상표가 남아 있는 재료도 일부 있었다. 이 같은 변형은 건물이 외적으로 일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귀환 이후 복원 방향의 기준이 되었다.

현재 관월당의 부재는 경기도 파주의 전통건축수리기술진흥재단 수장고에 보관돼 있으며, 전문가에 의한 수리·복원 작업이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국가유산청과 국외재단은 관월당의 원래 명칭, 위치, 배향 인물 등을 밝혀내기 위한 학술 연구를 지속할 계획이다.

문화유산을 매개로 이룬 신뢰와 협력의 결실

관월당의 귀환이 더욱 뜻깊은 이유는 그 과정을 이끈 일본 측 주지 사토 다카오의 진심 어린 결정 때문이다. 그는 해체와 운송에 소요된 제반 비용을 자비로 부담했을 뿐 아니라, “한국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건물의 본래 정체성과 가치를 분명히 알게 됐다”며 “이 건물은 한국에서 제자리를 찾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고 소회를 전했다.

그는 또한 고덕원 내 다른 한국 문화유산에 대해서도 학술 교류를 이어갈 수 있도록 별도 기금을 마련해 국외재단에 기부할 예정이어서 향후 협력의 지속성도 기대된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이번 귀환은 양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존중과 공감을 바탕으로 이뤄진 협력의 상징”이라며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은 해에 이 같은 성과가 나온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관월당의 귀환은 단순한 유물 이송이 아니다.
100년을 건너뛴 문화의 회복, 신뢰의 복원, 그리고 기억의 귀환이다. 관월당은 이제, 그 본래의 숨결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